2015년 4월 27일 월요일

네팔 메달 퍼레이드


4월 24일 금요일 콩고 부니아의 네팔에서는 작은 축제가 열렸다. 일년동안 유엔평화유지군으로 복무한 네팔 엔지니어링 평화유지군에게 유엔메달 수여식이 있었다.

평소에 룸메이트인 제인을 따라 네팔 부대에 자주 놀러갔던 나도 초대되어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수여식에 입장부터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다.


사복을 입고 같이 맥주를 마시던 네팔 친구들이 군복으로 차려입은걸 보니 제인도 나도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여식은 간단한 네팔에 대한 소개와 함께 행군으로 시작했다. 우렁찬 북소리와 절도있는 행군의 모습을 보며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알고보면 최소 대위부터 소령, 대령까지 군대에서 높은 계급이 사람들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닿게 되니 괜스레 내가 실수한건 없었는지 되돌아 보게 되었다.

민주콩고 전체의 평화유지군을 지위하는 파키스탄 장군의 연설이 끝난 후에는 네팔 평화유지군 대령의 연설이 이어졌다. 네팔 엔지니어링 평화유지군은 이투리 지역에서도 특히 FRPI 반군이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는 남 이루무(Irumu)지역으로 가는 길을 보수하였다. 민주콩고에서는 반군이 활동하지만 길이 없거나 너무 상태가 안좋아서 그 지역으로 접근 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부니아에서 남 이루무로 접근 할 수 있는 길을 네팔 엔지니어링 평화유지군이 보수 한 것이다. 메달 수여식이 시작되고 장군이 부대 대원 한명한명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수여식이 끝나고는 이번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무술 시범이 있었다. 태권도 시범까지 보였는데 칼 끝에 사과를 꼽고 발차기로 사과를 산산조각내는 시범에서는 기립박수가 절로 나왔다. 불이 붙어있는 링을 뛰고, 불타는 벽돌을 격파하는 등 정말 무술영화에서 나올 법한 시범을 보였다.






네팔을 위한 기도

콩고에 일하면서 가장 즐거운 일은 다양한 나라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부니아에서 네팔 엔지니어링 평화유지군과는 네팔 특유의 자연스러움과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기운으로 특히나 가깝게 지냈다. 이번주 토요일에는 핑퐁 토너먼터 경기를 부대캠프에서 하기로 계획했었는데 핑퐁을 못치는 관계로 나는 응원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토요일 아침 문자가 왔다. 네팔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핑퐁경기를 취소한다고. 사망자수는 시간이 갈 수록 600명에서 시작해서 천명, 이천명에 도달했다.

천만 다행으로 부니아 부대에서 가족들이 다친 사람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지진으로 집이 무너진 부대원들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멀지 않은 남키부주에 베니에서 근무하는 네팔의 평화유지군 중에서는 3명이 가족을 잃었다고 한다.

월요일에 1년간의 평화유지군 근무를 마치고 네팔로 돌아가는 3명의 친구가 있다. 그 중 한명은 집이 무너져내려 지금 가족들은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고 하는데 네팔안에서는 더 진도가 강한 9의 지진이 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도 한다.

일년 동안 콩고에 와서 가족과 떨어져서 평화유지군으로 일했는데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자신의 나라가 더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닌 폐허가 되있다는 생각은 하기가 힘들다.

네팔에서 더 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루빨리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 또 기도하자.

카우지-비에가 국립공원

룸메이트인 제인이과 집에서 영화를 자주 본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따로 할일이라고 없을 뿐더러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더더욱 하기 싫어지기 때문이다. 제인은 크리스마스 휴가동안 아일랜드에서 프로젝터를 가져왔는데 (그 큰 걸 콩고에서 영화를 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이 프로젝터가 아주 톡톡히 제 일을 잘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카데미 시상식 다큐멘터리 부문에 후보가 올랐다는 '비룽가'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콩고 남키부주 고마에 위치한 비룽가 국립공원에 대한 다큐멘터리었는데 국립공원에서 석유를 체취하려는 영국의 석유회사와 그 지역의 반군인 M23, 국립공원의 이익을 둘러싼 흥미로운 다큐멘터리였다.



특히나 저 다큐멘터리가 배경으로 하는 곳이 여기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닿을 고마라는 점이 더 다큐멘터리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제인과 나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고릴라를 보면서 "우리 꼭 콩고뜨리전에 고릴라 보러가자."라는 다짐을 했다.

몇달이 지난 뒤, 그 다짐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워크샵으로 온 남키부주의 부카부에서 그들을 만나게 된것이다. 휴가로 르완다에 가있었던 제인은 고릴라를 보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현지버스를 타고 키갈리에서 부카부까지 6시간을 달려와 국경에서 실랑이 끝에 부카부에 도착했다.

워크샵이 없는 주말을 이용해 우리회사 동료들과 제인 이렇게 총 9명이 부카부에서 차로 한 시간 반 쯤 떨어진 카우지-비에가 (Kahuzi-Biega)국립공원을 찾았다.

국립공원에서 대여하는 차는 150달러, 5명정도 탑승할 수 있는 집차이고, 우리는 회사의 운전사를 통해 조금 싸게 차를 대여했다. 그날 아침 국경을 건너서 녹초가된 제인은 르완다에서 새로 산 배게를 배고 짧은 아침잠을 청했고, 나와 동료들은 고릴라를 본다는 생각에 어린이같이 농담을하며 실없이 웃으면서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아스팔트도로까지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로 보수가 안되서 차에 앉아 있어도 저절로 HOT의 캔디춤을 추게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국립공원 사무실은 생각했던 것 보다 제법 잘 유지되고 있었다. 깔끔한 건물의 사무실에 번듯이 국립공원 표지까지 걸려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개인정보를 적는 종이를 채우고 (종이가 모잘라다고 해서 두 명이서 한 종이를 채웠다... 눈물이..) 입장료를 지불했다. 외국인은 200달러, 현지인은 20달러. 외국인은 현지인보다 열배나 더 내야한다니 동료에게 '이거 너무 바가지 아니야?' 투덜대니 한마디 한다. '우리 고릴라잖아'. 그래 너희 고릴라지.

하지만 고릴라를 볼 수 있는 우간다와 르완다는 3-4배 정도 더 비싸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고릴라를 보시려면 모두 콩고로!

입장료를 내고 동료들끼리 우리 정말 고릴라를 볼 수 있는거야 하며 들떠 있던때에 우리에게 찬물을 끼엏는 소식이 전해왔다.

국립공원에는 총 12 가족의 고릴라가 사는데 그 중 현재는 두 가족만이 인간에게 익숙해서 관광객들이 다가갈 수 있다. 치마누카 가족과 무가루카 가족이 그 두 가족이다. 치마누카 가족은 총 27마리의 구성원으로 수컷인 치마누카와 암컷들과 아기고릴라 들로 구성되어 있고, 무가루카는 원래 가족을 이루어서 살았지만 4살때 숲에 있던 덫에 손목을 잘린 후에는 지금까지 암컷을 들이지 않고 홀로 살고있다.

문제는 오늘 총 관광객은 총 13명인데  한 가족을 볼 수 있는 인원이 총 8명인 것이다. 우리 모두 이왕이면 수컷, 암컷, 아기들을 다 볼수있는 치마루카 가족을 보고 싶었는데 (무가루카 미안해) 5명은 무가루카만 볼 수 있게 된것이다. 하루에 두번 왔다 갔다 할 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우리 모두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인지라 다음 기회란 없을 것 같고, 국립공원 관계자들과에게 설득 끝에 6명, 7명 그룹으로 나눠 첫 그룹 먼저 치마루카 가족을 보고 그들의 동태와 컨디션을 살핀후에 나머지 그룹이 보러 오기로 했다.

하지만 6월부터는 지금 인간과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세번째 가족이 관광객들에게 공개된다고 하니 6월부터는 8명 이상이와도 이런 문제는 없어질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한 후 잠깐의 브리핑을 받았다. 국립공원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방문시 주의해야할 점 등이였는데, 카메라 플레시는 끄고 사진촬영을 해야하고, 개미가 많이 때문에 양말은 바지위로 당겨 신고, 고릴라 앞에서는 아주 조용해야한 다는 것이였다.


국립공원에 사는 고릴라는 eastern low land 고릴라로 민주콩고에만 서식하고 있다. mountain 고릴라와는 다르게 한 가족에 수컷이 한 마리만 있고, 다른 종료의 고릴라보다 덩치가 크고 얼굴이 빈대떡같이 납작한게 특징이다. 그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채식주의자이다. 대나무, 잎, 나무뿌리를 먹고 자란다.

이외에도 적도기니, 콩고(브라자빌), 카메룬 등 서아프리카에 서식하는 western lowland 고릴라, 민주콩고 화산지역, 우간다, 르완다에 서식하는 mountain 고릴라가 있다.

양말을 바지에 꼭꼭 집어넣고 숲속으로 향했다. 숲속으로 들어간 후에는 고릴라가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달렸지만 우리는 한시간정도 걸었다.



고릴라 가족을 찾은 후에는 서로에게 질병을 옮기지 않기위해 마스크를 쓴다. 한 한시간을 걷고서 드디어 고릴라 가족과 만났다. 수컷은 치마루카는 사람 따윈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엎드려서 풀을 뜯고 있었고, 아기 고릴라들은 그 등에서 장난을 쳤다. 나무에 올라가다가 가지가 아기 고릴라의 무게에 못 이겨 부러지기도 하고, 암컷끼리 서로 이를 잡아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몸이 간지러운지 정말 사람같은 손(발인가?)으로 박박 긁기도 했다.











보통 가족을 리드하는 수컷이 인간에게 익숙해지면 다른 가족들도 별 적대감 없이 인간들은 대한다고 한다. 하지만 고릴라와의 7미터의 거리는 항상 유지해야 한다.

수컷인 치마루카가 몸을 일으키고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나서야 우리도 이제 여한이 없이 숲속을 떠났다. 국립공원에서 일하는 관계자들은 방문이 끝난 후 카우지-비에가 국립공원의 사절단이 되어 달라고 우리에게 요청했다. 이렇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아직까지 국립공원은 콩고의 비자문제, 치안문제 등으로 콩고에서 일하는 유엔이나 엔지오 사람들 이외에는 관광객이 적다.



그리고 1996년에 내전동안 다섯 고릴라 가족이 죽었는데, 아기 고릴라를 식용으로 암시장이 팔기도하고, 반군들이 먹기도 하고 그래서 그랬다.

하지만 국립공원을 보존하려는 많은 노력으로 지금은 몇년이 걸리는 인간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 세번째 가족까지 관광객들에게 공개가된다니 이제 카우지-비에가 국립공원과 고릴라가 빛을 볼때가 아닌가 싶다.

콩고에서 느끼는 세계화?


가끔 콩고에서도 아니면 휴가로 다른 아프리카에 가면 한국에서 만들어진 티셔츠를 입는 사람을 보게된다. 그 사람들은 비록 그 글자가 한글인지도 모르겠지말 말이다.

고마에서 'be the reds'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보며 2002년 월드컵을 생각하고, 부니아에서 **화단이 적혀있는 조끼를 입은 사람을 보면서 한국 어딘가에에 있을 꽃을 생각해본다.

워크샵으로 온 부카부의 공항에서는 '최남단 방어축제'가 적혀있는 조끼를 입은 사람을 봤다. 나는 방어도 안 먹어보고, 방어축제도 안가봤는데, 한국에 가면 겨울에 방어축제 한번 가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어축제 조끼가 어떻게 하다가 콩고까지 왔는지 그 조끼의 여정을 생각하면 박수를 쳐주고 싶다. 나도 그 방어축제 조끼가되서 최남단에서 콩고 부카부까지 오는 여정을 경험해보고 싶다.

남아공 시장에서 만난 태극기 비니를 쓴 상인

부카부에서 만난 최남단 방어축제 조끼를 입은 콩고인

2015년 4월 17일 금요일

가벼운 글

가벼운 글을 쓰고싶다. 새털처럼 가볍운 . 최근들어 사람의 글을 재밌게 읽고, 그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중혁 소설가와 고등학교 동창 하진이다.

김중혁 소설가의 글을 에세이 뭐라도 되겠지 읽고, 하진이의 글을 블로그를 통해 읽는다.

특히나 출판하는 글이나 웹상에 올리는 글은 다른 사람이 본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렇게 때문에 살짝 멋있게 보이고 싶고, 거짓말도 들어가고 한다. 하지만 둘의 글은 그런거 하나없이 담백하고 솔직하다.

나도 잘쓰고 싶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글쓰는걸 싫어하게됬다. 귀찮고 무엇보다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피하고 피하고 쓰기싫고 쓰기싫고 했다. 글을 쓰고싶지만 쓰러고하면 쓰기 싫고 부담스러웠다.

근데 둘의 글을 읽으니 나도 글을 쓰고싶어졌다. 기분 좋아지게 하는 . 신나서 쓰는글. 솔직한 그런 .


하진이 블로그

김중혁 뭐라도 되겠지


세월

1년이라는 세월이 갔다. 나는 일년동안 한살을 먹었다. 26살에서 27. 살아있어야만 나이를 먹을수 있다. 그래서 살을 먹을 있다는게 미안하다.

작년 그날 나는 우간다에 있었다. 처음 받는 휴가로 들떠 있을때 우간다의 호스텔에서 뉴스를 봤다. 뉴스를 보고, 보고 보고, 다음날 사파리투어를 가야하는데 마음이 불안해서 가기가 싫어졌다. 그래도 가서 동물도보고 폭포도보고 사진도 찍었다.

콩고에 돌아와서 모든게 싫어졌다. 여기와서 뭐하고 있는건지,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여기와서 뭐하는 건지. 메일을 확인하고 워드를 키고 하는것이 무슨의미가 있는지. 모든게 정말 의미가 없어졌다.

어떻게하면 마음의 무게가 가벼워질지. 안가던 교회도 가봤다. 근데 다들 노래를 부르고 춤을추고 즐거워보였다. 그래서 조금 화가났다. 그리고 슬퍼졌다.

다음 휴가는 남아공으로 휴가를 갔다. 배를 탔다. 구명조끼가 어디에 있는지 먼저 찾아봤다. 조금 토할 것만 같기도 했다.

가을에 한국에 들어가서 시청앞을 지나다가 세월호 희생자분향소를 지나갔다. 이제서야 와서 미안했다. 사진속의 아이들의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 얼굴을 보면 말을 같아서 얼굴을 보면 교실에서 조잘조잘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일 같아서.

그리고는 1년이 지났다.

페이스북을 켜지 않았으면 1주기인지도 몰랐을 것이었다. 미처 읽지못한 눈먼자들의 국가: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책을 다시 폈다. 그리고 1년전 그날은 생각해본다. 그리고 학생들을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가 앗아간 아이들을 생각해본다. 교실에서 졸음을 참으며 수업을 듣고 있었을, 친구들과 쉬는시간에 수다를 떨었을, 야자를 하고 있었을, 3이라는 압박에 조금 스트레스도 받고 있었을 그러면서도 대학 생활은 어떨지 기대하고 있었을..

마냥 슬퍼하다가도 마냥 슬퍼해서만은 안된다. 슬퍼하기만하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