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0일 일요일

오카피와 반군

한국에 호랑이가 있다면 콩고민주공화국에는 오카피(Okapi)가 있다. 콩고를 대표하는 동물로 얼룩말에 반 윗부분의 얼룩은 지운 것 같이 생겼다. 콩고를 치면 이미지에 이 동물이 맨 먼저 나올 정도로 콩고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콩고 전역에도 곳곳에 오카피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콩고 동물 오카피와 반군과 무슨 상관일까? 남수단과 우간다와 접해있는 Orientale 주의 Mambasa 구에는 울창한 산림이 있다. 이 곳에 오카피가 거주하는데, 바로 오카피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구역 때문에 반군이 만들어졌다.

오카피 보호구역이 이 구에 생기면서 주민들은 사냥도 할 수 없게되고 많은 경제활동에 지장을 주게 된 것이다. 이 보호구역에 맞서기 위해 반군이 형성됬다.

그 반군은 바로 Morgan's army group 이라는 반군이다. 처음에는 맘바사구의 주민들로 만들어진 이 반군은 다른 부족들이 함께 동참하면서 맘바사 구 주민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만들어진 이 반군은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맘바사 구의 마을을 약탈하고, 마을 여자들을 강간하면서 오히려 구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콩고를 상징하는 오카피가 오히려 반군을 만들다니, 참 아이러니 하다.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Mongbwalu 뭉괄루 출장

콩고의 Orientale 주(province)의 Ituri 구역(district)에 Djugu 구(territoire)의 Mongbwalu 시(cité)에 출장을 다녀왔다. 부니아에서는 78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곳이다. 자동차로 1시간 반이면 도착할거라고 예상했지만 2시간 반이 걸려 도착했다. 가는 길에 '도로'라고 할만한 시멘트가 깔린 길은 없었고, 그나마 판판한 흙 정도면 아주 양호한 길이였다. 오는 길에는 비가 오는 바람에 앞에 자동차 바퀴가 진흙에 빠져서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다.




가는 길에 여러 마을을 지났는데, 2시간 반 정도 가는 길에 한 번은 마을을 지날때 끈으로 차를 막아서서는 '통행료'를 요구했다. 좋은 일을 하러 가는 길이라며 운전사가 설명하여 통행료를 안내고 지나칠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나라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닌 그냥 마을 사람들이였다.

역시 어린 아이들이 참 많았다. 나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muzungu!(외국인)'하며 소리를 쳤다. 4살배기 아이가 1살정도 된 아이를 업고, 5살배기 아이가 2살을 업고 있다.

막 걷기 시작한 것 같은 아이들고, 머리에 나무를 지고, 자기 몸 만한 노란 물통에 물을 채워 머리에 이고 간다. 아이들은 어디서 난 바퀴인지 자동자 바퀴를 굴리며 논다.

우리가 방문한 ngo는 우리가 방문한 답례로 닭을 내밀었다.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다며 살아있는 닭의 두 발을 묶어 우리에게 건냈다. 나는 이 풍경에 살짝 당황하기도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같이 간 동료가 기분 나쁘지 않게 사양하여 살아있는 닭과 한 차를 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왔다. 비가 오는 날이면 Djugu 구의 사람들은 길가로 나와 금을 찾는다. 말로만 들었지만 이렇게 내 눈을 보기는 처음이다. 추적추적 젖은 땅을 열심히 들추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강물 색이 누런 적색이였는데 이렇게 강물이 탁한 이유도 금을 찾느라 흙을 강물에 씻어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콩고에서 처음 들어보는 프랑스어 단어가 있다. 바로 une machette. 사전 상으로는 (남미의 벌채용) 큰 칼. 이라고 나온다. 사극에서 망나니가 들고 나올 법한 큰 칼이다. 킨샤사에서의 보안 브리핑에서 저녁의 무법자들이 이 칼을 들고다니며 사람들의 팔 다리를 자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 알게된 단어다.

사실 시골에서 낫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1994년 르완다 제노사이드를 소재로 한 '호텔 르완다' 영화를 본 나로서는 이 칼이 단순한 벌채용 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가끔씩 이 칼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겁이 나곤 한다. 이 칼이 콩고에서 '벌채용'으로만 사용되는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2014년 3월 23일 일요일

파투와 세네갈

내 새로운 룸메이트는 세네갈에서 온 파투이다.

오늘 여러가지 세네갈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재미있는 점이 많다.

우선 세네갈은 그렇게 크지 않아서 아마 사용되는 언어가 7-8개정도 밖에(?)되지 않는다고 한다. 300여개의 언어가 있는 콩고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다.

모두가 말하는 언어는 월로프(Wolof)이다. 월로프라는 민족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투는 월로프를 모국어 같이 하지만 사실상 모국어는 sêrère라는 언어라고 한다. 아빠가 이 부족 출신이고 엄마는 원래 이 민족이지만 월로프 가족에 입양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나 같은 민족 사람들이 왔을때만 모국어를 사용하고 다른 가족들이랑은 다 월로프로 이야기 한다고 한다. 궁금한 마음에 sêrère 로 인삿말을 물어보니 인사할때는 Nafiyo, 대답으로는 Miheime라고 한다. 역시 언어는 아무리 배워도 재밌다.

http://en.wikipedia.org/wiki/Serer_language

종교는 인구의 95%가 무슬림, 5%가 기독교라고 한다.

세네갈 중간에 보면 감비아가 있는데 이 나라와의 관계가 특이하다. 세네갈은 프랑스 식민지여서 프랑스어권, 감비아는 영국식민지어서 영어권 하지만 두 나라 다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모두 월로프를 사용하기 때문에 구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세네갈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는 youssou-ndour라는 가수라고 한다. 또 나한테 레오폴 세다셍고를 아냐며, 세네갈 사람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아카데미에 등록된 사람이라고, 꼭 찾아보라고 일러줬다.

2014년 3월 20일 목요일

no one forced you to come here

no one forced you to come here. It was your choice, if you don't want to stay you can go back. You are a free woman.

이라고 아레아가 말해줬다. 정말 생각해보면 여기 오고싶은건 나였다. 여기 지원해서 불어로 지지고 볶고 하면서 불어 실력을 늘려야 겠다는 것도 나의 선택이였다. 지금 그래서 지지고 볶고 하고있는거다. 실력을 늘리고 싶으면 내가 노력해야하는거다.

지금 너와 내가 있는 이 자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고 싶어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현재 나의 직업에 만족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2014년 3월 18일 화요일

이별과 시작


에리카가 떠나는 날. 국제이주기구 부니아 사무실장이였던 에리카. 아침에 에리카가 진행했던 프로젝트 수혜자인 여자가 와서 에리카를 잡고 펑펑 울었다. 고맙다며 도와줘서 고맙다며. 더불어 나도 눈물이 났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한 명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됬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 사람이 떠나는게 이렇게 여러사람들에게 슬픔을 주는게 어쩌면 그 사람이 잘 산걸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카가 가고, 이 집에는 나만 남았다. 쓸쓸한 기분이 들면서도 이제 기댈사람이 없고 혼자 해쳐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제이주기구와 난민기구가 다른 점은 국제이주기구는 자연재해로 인해 이주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목적이라면 난민기구는 분쟁으로 인해 이주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다른점이라고 한다.

오늘 부니아의 하늘은 너무 예뻤다. 구름도 뭉개뭉개, 저녁노을 하늘은 파스텔을 뿌린것처럼 아름다웠다. Fleury 운전사 아저씨가 퇴근 길에 부니아 다른 곳을 구경시켜주셨다. 정북아 300채 집을 지으려고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20채 정도만 짓고 끝나서 지금은 군인들이 쓰고있는 집들, 경찰학교가 있어서 quartier policier라고 불리는 새로 생긴 지역. 공무원, 의사, 박사 같이 돈 많은 사람들이 살려고 삐까번쩍한 집들이 한창 지어지고 있었다.




광물회사가 운영하던 목축농장은 늘어나는 부니아 인구에 못이겨 농장을 접고 사람들이 집을 짓도록 땅을 내줬다고 한다. 그 정도로 부니아의 인구는 많이 늘어나고 있다.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부니아 컴백

부니아로 돌아왔다. 나름 내 근무지라고 그래도 집에 온 기분이 든다.

부니아는 3월 중순 부터 12월까지 우기라고 한다.
그래도 3-5월까지는 건기 우기 섞인 것 같이 일주일에 한 두번씩 비가 오지만 9월정도는 매일 비가 올 정도라고 한다.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 빗방울 하나 안떨어졌다고 하니 나는 운이 좋은거라고 한다.




오늘 사실 경유하다가 비행기를 놓칠뻔 했다. Beni라는 곳에서 비행기가 경유를 했는데 20분정도 기다렸다가 간다그래서 화장실에 갔다. 나오니 같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불길한 비행기 시동거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비행기가 출발하려고 하고, 나는 못탔고, 어떻게 10명도 채 안되는 승객을 세지도 않냐고 소리질렀지만 비행기는 무심하게 갔....다가 돌아왔다!

다행히 이륙하기 전이여서 활주로를 한바퀴 돌다가 돌아왔다. 다음 비행기가 월요일이라는 말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너무 다행이다. '화장실은 갈 수 있을때 가자'라는 신념을 지키자 주의지만 그래도 비행기 탈 때는 눈치 봐가면서 화장실에 가야겠다.







워크샵, 교육도 끝나고 다음 주 부터는 뭔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항상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부터 서지만 잘 할 수 있을까 보다는 '잘 하겠다!'라는 마음을 먹고 힘내자.

2014년 3월 14일 금요일

결혼 지참금

어제는 고마 동료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28살의 미혼인 동료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결혼의 압박이 들어오지만 아직 결혼하긴 싫다고.

콩고에는 결혼 지참금이 중요하다고 한다. 보통 남자네 집에서 여자 쪽에 지참금을 주는데 이 금액을 정하기까지 남자 가족과 여자 가족의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내 딸은 젊고 대학도 나오고 얼굴도 이쁘니까 지참금을 더 줘' 이런식으로 말이다. 동료는 자기가 상품처럼 팔려가는 느낌이 들어서 이게 싫다고 한다.

보통 지참금은 소 3-4 마리(한 마리 500만원 정도) 혹은 그 상당한 금액.

이혼을 할때는 여자 쪽에서 받은 지참금의 두배를 돌려줘야하기 때문에 불행한 결혼이 지속되더라도 여자 가족은 참고 살으라며 오히려 여자를 달래는 편이 허다하다고 했다. 남자쪽이 먼저 이혼을 하자 그래도 사정은 마찬가지. 이런 저런 이유때문에 결혼을 고민하는 동료. 

참 결혼이라는게 먼지. 클수록 이런 제도가 필요하긴 하겠구나 느끼지만 가끔은 결혼이 뭔데 싶기도 하다. 이래서 여자가 경제적 능력을 길러야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2014년 3월 13일 목요일

해지는 키부 호수 풍경

이렇게 팔자가 좋을까 싶으면서도 참 외롭다 싶으면서도 지금을 즐기자 싶다

호텔 방안에 있다가 창문 밖 풍경이 너무 예술이여서 밖으로 나왔다. 마치 옆서의 한 곳에 와있는 것 처럼 눈 앞에 펼쳐진 호수가 아름답다.





MONUSCO가 수도 킨샤사에서 고마로 기지를 옮기면서 200~500명정도의 MONUSCO 사람들이 고마에 곧 올거라고 한다. 고마는 현재 여기저기 집 공사 중이다. 호텔 호숫가에 줄줄이 늘어선 집 공사를 보며 여기 동료 한 명은 이제 호숫가 풍경도 다 뺏기게 생겼다며 안타까워 한다.

고마가 왕년에는 유명한 관광지였다고 한다. 벨기에 성직자가 시작한 낙농업으로 다른 지역에 수출할 만큼 질 좋은 치즈도 유명하고, 호수에 화산에 여행객들로 붐볐다고 한다.

정말 그랬나 본지,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artisan(수공업자)들이 모여 기념품을 파는 조그만 골목도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걸어 다닐 수 없다는게 제일 아쉽다. 안전 문제때문에 고마에서는 아주 가까운 거리고 차가 아니면 이동할 수 없다.

하지만 고마 안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으로서는 그저 모든게 평화로워 보이기만 한다.

차도 있고 마음 맞는 친구도 있으면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고마 구경도하고, 르완다 국경도 가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싶어서 지도를 찾아보았다. 이번 워크샵에 참여한 동료들 중 부카부(Bukavu)에서 온 사람들이 몇 있었다. 고마에 배를 타고 왔다고 해서 찾아보니 정말 고마에서 키부 호수를 끼고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곳이였다. 배로는 2시간 반에서 3시간 정도 걸렸다고 하니 키부 호수의 크기가 정말 어마어마 한가보다.


또 한 가지 재밌는 점은 키부 호수 가운데에 있는 이주위(idjwi)섬이다. 이 섬 출신 호텔 종업원에 따르면 이주위섬은 북 이주위, 남 이주위로 나누어져 각각 다른 왕이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엄연히 대통령이 있는 한 나라에 또 다른 두 명의 왕이라니.. 콩고 너란 나라.. 어찌됬든 고마에서 파는 바나나와 각종 과일들도 다 이 섬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키부 호수에서 볼 수 있는 조그만 고기잡이 배도 이주위 섬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섬은 아프리카에서 마다카스카르 다음으로 2번재로 큰 섬이라고 한다.

다음에 고마에 다시 올 기회가 생기고, 마음 맞는 친구가 생기면 꼭 주말에 이 섬에 놀러가고 싶다!

역시 사람은 밖으로 나와야해.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마음 가짐


지도에서만 보던 고마 옆 Kivu 호수

호수라고 하기엔 끝이 안보이는 바다와 같은 호수

해지는 색깔이 너무 예뻐 호텔에서 한 컷

외국에서 이렇게 한국이 그리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한국에 있어도 항상 떠나고 싶고,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있던 것 자체가 그렇게 좋았던 그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한국이 그립다. 사실 한국이 그리운 것 보다는 한국 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립다.

항상 가진 것 보다 가지지 못한 걸 아쉬워 하고, 자신감 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나.
이번 일년은 가진 걸 감사해하고, 나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감을 가지는 그런 일년이 되야지 하고 다짐해본다.

2014년 3월 11일 화요일

고마 풍경

유엔난민기구에서 고마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기 때문에 고마에 도착하기 전에는 막연히 고마 전체가 난민촌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난민촌은 고마 도심에서 13km나 떨어져 있다고 한다.

바다같이 넓은 호수가 있는 고마는 참 아름다운 곳이다. 고마를 치면 모든 기사가 M23반군에 대한 이야기여서 도착하기 전 두려움이 앞섰던 건 사실이다.

게다가 UNHAS기를 타고 착륙한 고마에는 활주로 주위에 잘못 착륙하여 부서진 듯 한 비행기와 비행기들의 잔해가 보였다. 

처음 도착해서 놀란건 공항을 나오자마자 나를 둘러싸고 바나나 살 돈을 달라는 아이들이었다. 나를 데리러나온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그냥 안보이는 것 같이 무시하라고 조언해준다.

고마는 흙이 검다. 또 도로포장이 된 도심외에는 길이 정말 엉망이다. 화장실이 급한 상태에서 차를 탔다가는 몇초도 못 버티고 실수를 할 것 같다. 

아침에는 노란 통을 몇개씩 자전거에 묶어서 어디로 향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바로 호숫가에서 물을 길으는 사람들이다. 집에서 물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가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해가 지는 호숫가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고마 도심에는 손으로 그린 듯한 광고들도 보인다. 수십년전 손으로 그린 한국의 영화포스터가 떠올른다.



고마에서는 또 '추쿠두'라고 불리는 나무로 만든 흡사 우리나라 씽씽카와 비슷한 걸 타고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바퀴가 2개에 다리를 한 쪽 올리고 다른 한 쪽으로는 앞을 나가게 하는 이동수단인데 굉장히 튼튼해서 무거운 물건도 쉽게 옮길 수 있다고 한다. 북 키부(Nord Kivu)의 명물이라고 한다. 고마에는 오토바이가 많은데 90%이상이 택시 역할을 하는 오토바이리고 한다. 그 외에도 승용차 택시는 모두 시에 정식으루 등록되어있고 모두 40여대 쯤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 문제때문에 오토바이 택시도 승용차 택시도 탈 수 없는 이 상황이 조금은 답답하다.


(2014년 3월 10일 고마 출장 후 쓴  글)